방산 분야 전문가로 살아가다 보면 도움이 필요한 업체를 자주 만납니다. 어느 날은 친한 장군 출신 지인에게서 경기도 인근 장갑 생산 기업을 도와 달라는 부탁을 받았습니다. 소개 받은 업체는 국내에서 장갑을 생산하는 업체였습니다. ‘해외 조달’에 전문인 제가 도울 일이 있을까 유심히 살펴보았습니다.
장갑 업체 대표 A 씨는 대기업 패션 부문 출신이었고, 퇴사 이후 원단 무역 사업을 시작했다고 말했습니다. 드라마 ‘응답하라 1988’에서도 주인공 덕선의 친구 아버지가 원단 사업으로 큰 돈을 벌었다는 설정이 있었습니다. 장갑 업체 대표도 당시 사업이 순조로웠다고 답했습니다. 2009년 미국의 ‘리먼 브라더스’ 사태가 발생하면서 미수금을 받지 못하기 전까지 말이죠.
그렇게 A 대표는 원단 사업을 접었고, 거래하던 원단 가공 업체에서 배운 기술을 활용해 장갑과 의복을 만드는 회사를 창업했습니다. 대표는 자신이 특전사와 헌병이 쓸 장갑 및 생활 근무복을 납품하면서도, 군 장갑 수요가 이렇게 많을 것으로 예측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저는 이 대화로 국방과 연관되지 않은 민간인에게는 군수산업이 낯선 분야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A 대표와 주기적으로 미팅했습니다. 업체는 이미 국내에서 기술력을 인정받아 경찰청에 방검장갑과 토시 3만 페어를 납품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장갑업체 기술 수준이 해외규격에 맞출 역량이 되는지 꼼꼼히 점검했습니다. 자료로 정리해 제가 속한 미국 본사에 상품소개서와 샘플을 보냈더니 긍정적인 반응이 돌아왔습니다. 특히 미국 GSA(조달청) 등록업체가 긍정적인 답변을 줬고, 추가 샘플을 주문 받았습니다. 기업 거래를 속단할 순 없지만, 상황은 순조롭게 이어졌습니다.
저는 수출 판로를 탐색하는 동시에, 특수목적용 장갑의 수요가 있는 국내 수요처를 파악했습니다. 규격에 엄격하게 맞출 기술력이 가장 중요한데, 규격을 파악했다면 그 홍보도 자연스럽게 이뤄집니다. 이미 경찰청에 납품하는 중인 상품이라는 사실을 바탕으로 소방청에 영업했습니다. 지금은 경남 및 전남소방본부에서 소방관 구조용 장갑 구매 여부를 검토하는 중입니다.
장갑업체 사례처럼, 의식주 관련 비즈니스도 의지와 방향성을 갖추면 충분히 국방과 연계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민간에서 의식주 관련 비즈니스를 하는 기업은 국방 분야 진출을 위해 어떤 준비가 필요할까요?
제가 경험을 통해 얻게 된 세 가지 해답을 이 글을 통해 나누고자 합니다.
첫째, 규격을 이해하고, 그 규격에 맞는 제품 생산하기
민간에 KS 규격이 있듯이, 군에도 군 특성에 맞는 규격이 존재합니다. 양말, 장갑 등 개인에게 지급되는 물품부터 무기체계까지 모두 국방규격을 적용하며, 그 규격에 맞는 제품을 구매합니다. 대표적으로 한국과 미국이 속한 NATO(북대서양조약기구)에서는 규격을 지칭할 때 ‘Mil-Spec’이라는 용어를 사용합니다. 이를 만족하는 제품이라면 NATO 소속 국가에 모두 납품할 수 있습니다.
둘째, 군의 납품 절차 이해하기
군 납품은 군이 정한 납품 행정을 이해한다는 의미입니다. 민간에서도 판매자와 구매자 간 품질, 가격, 납기, 시장성이 맞아야 거래가 이뤄집니다. 군은 여기서 조금 더 특수하게 따져 봐야 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장병의 생명을 보호하는 제품은 품질검사 과정이 한층 까다롭습니다. 군에서 제시하는 구매요구서에 그 절차가 상세하게 소개돼 있으니, 잘 숙지하면 문제 되지 않습니다.
셋째, 해외가 원하는 조건 갖추기
앞서 소개한 방검장갑은 국내 인증을 비롯해, 미국 ANSI Cut Level 인증, 유럽의 EN388 인증을 갖고 있습니다. 방탄 제품은 미국의 NIJ(미국 법무부) Level 인증도 추가로 획득했습니다. 여러 인증을 통과했다는 사실은 세계 시장 진출이 가능함을 의미합니다. 미군 및 NATO 회원국은 이런 인증이 있는 제품의 구매를 원칙으로 합니다. 방검장갑은 ANSI, EN388 등 국제 인증을 획득했기에 해외시장 노크가 가능했습니다.
부산의 B정밀이라는 회사가 있습니다. B정밀 대표는 어려운 환경을 극복하고 기회를 잡아, 방산 대기업에 납품하며 안정적으로 회사를 이끌고 있습니다. 국내 방산업체가 원자재를 가공만 하며, 5명의 인건비를 제외하고는 모두 수익이 되는 기업입니다. 처음에는 연간 매출이 30억원에 불과해 규모가 작다고 생각했지만, 수익 구조를 살펴보니 실속 있는 매출을 유지하는 알짜기업이었습니다.
B정밀 회사소개서를 보던 중 ‘AS9100 인증’을 획득했다는 내용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대표님께 인증 배경을 물었더니, 국내 방산 대기업에 협력업체로 등록하려면 필수적으로 갖춰야 하는 조건이라 획득했다고 설명했습니다.
AS9100은 미국 FAA(연방항공청)에서 항공 부품류를 생산하는 업체를 인증하는 제도로, 상당한 노력과 시간을 소요해도 받기 힘듭니다. 이 인증만으로도 세계를 상대로 비즈니스 영역을 넓힐 수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대표님들이 많아 안타까운 마음입니다.
의외로 총이나 무기를 제조해야만 국방산업에 진출한다고 생각하는 기업이 많습니다. 그러나 군도 의식주를 기반으로 무기를 다룹니다. 민간인 의식주 상품과 다른 점은 전투 환경이 반영된 규격입니다. 규격을 이해하고, 해외 인증제도를 잘 활용한다면 해외시장 개척은 시간의 문제이지 넘지 못할 산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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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호
국방분야 사업진출 및 해외 수출 전문가
現) 탤런트뱅크 전문가
現) Avix Global 한국지사장
前) 방위사업청 연구원/파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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